[잇츠데일리 =최수일기자] 지숙자 화가의 현대 반추상 작품은 전통과 현대가 맞닿는 지점에서 이렇게 꽃을 피운다. 화면 전체를 휘감는 붉은 꽃다발은 단순한 장식적 요소가 아닌 생명의 에너지와 자연의 순환을 담고 있으며, 그 하단에 어김없이 자리 잡은 시그니처 요소인 ‘게’는 관람자로 하여금 화면 속에 숨겨진 내밀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이 게는 단순한 상징을 넘어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은유하는 시각적 장치로 기능한다. 전통적 소재와 현대적 구성이 결합해 작가의 정체성과 시각적 실험이 한데 녹아든 것이다.
이 작품은 전통 문인화의 일필휘지의 기운이 강하게 남아 있으면서도 아크릴 물감의 두터운 질감이 더해져 현대 회화의 활동성과 강렬함이 살아 숨 쉰다. 꽃잎들이 붉은 물결처럼 흐르며 화면 곳곳에서 폭발하듯 피어오르는 느낌은 단순히 화려함을 넘어 감각적 해방을 암시한다. 크레파스와 먹의 거친 붓질은 나뭇결처럼 촘촘한 결을 만들며, 마치 꽃의 생명력이 화폭을 뚫고 뻗어나가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이러한 시각적 구성은 화면의 구도와 원근법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역설적으로 깊이감을 부여하는 점이 흥미롭다. 볼륨감은 우연적이면서도 필연적이고, 이는 작가의 의도와 물성의 상호작용에서 탄생한 마법 같은 효과다.
붉은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나는 장면은 피고 지는 생명의 사이클을 상징적으로 담아내며, 그 속에서 게가 보여주는 생명력은 일종의 자연 순환의 은유로 읽힌다. 작가는 과거 인터뷰에서 곤충이 나뭇결을 갉아먹거나 새가 나무를 쪼아내는 흔적이 자연의 일부가 되는 과정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이 작품에서도 그러한 자연적 파괴와 재생의 흔적이 심층적으로 녹아 있다. 화면 속 붉음은 단순한 낭만적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삶의 격정적 순간과 상처마저도 품어 안는 대지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듯 하다.
지숙자 화가는 단순히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재료의 실험을 통해 새로운 미감을 창출하고 있다. 그간 그녀는 옻칠종이와 장지에 이르는 과정에서 각기 다른 물성의 대조를 활용해 작품의 입체감을 극대화하고, 다양한 재료의 조합으로 촉각적으로 느껴지는 나뭇결을 표현하는 등 왕성한 시도를 해왔다. 마치 화면이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보는 이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갖고 있는 이유도 그와 같다.
붉음의 심연은 생명력과 동시에 생명의 소멸을 상기시키며, 그러한 상반된 메시지들은 마치 자연이 가진 양면성을 품고 있다. 특히 곳곳에 게가 존재하는 장면은 바닷가의 생명력을 떠올리게 하며, 자연의 작은 존재조차도 작품 전체의 내러티브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 모든 시각적 요소들은 관람자에게 단순히 ‘보는 즐거움’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사유의 계기를 제공한다. 지숙자 화가는 붓질의 즉흥성과 물성의 실험을 통해 ‘추상은 형태가 아니라 작가가 정하는 감각’이라는 철학을 화폭 위에 구현했다. 물방울 하나조차도 규정된 형태가 아닌, 작가적 해석으로 다시 태어나며 자유로움 속에서 관람자에게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이 작품은 지숙자 화가가 새로운 미적 여정을 걸으며 현대적 해석과 전통적 기법의 교차 지점에서 발견한 가능성의 결실이다. 정열적 붉음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과 철학은 그 자체로 한국 현대 추상미술의 새로운 장을 열 가능성을 시사하며, 작가가 앞으로 펼쳐나갈 또 다른 시각적 서사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높인다.